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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이해를 넘어 용납으로.

신생아들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울음을 선택하게 됩니다. 아직 부모가 아니기에 잘 모르긴 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엔 똑같은 울음일지라도 부모는 아이의 요구가 무엇인지 명민하게 파악하고 필요를 채워준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언어중추의 발달과 적절한 자극이 주어지는 환경속에 있을 때 말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면서 점차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 언어로 옮겨지게 됩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아이가 울면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때 '아직 어리기' 때문에 떼쓰는 것에 대해 어느정도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그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똑같은 모습이라면 우리는 철부지라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물론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훈련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게 되지만요.)

 

특수학교나 학급에서 주로 정신지체나 자폐를 가진 친구들을 상대하면서 그 아이들만의 의사소통법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노력을 하게 됩니다. 마치 갓난아이를 가진 부모가 아이의 울음의 의미를 알고자 노력하는 것처럼 학생들의 행동의 진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는 것이죠. 주로 지능이 떨어지는 친구들은 뇌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정서장애를 동반한 경우도 많고 '사회성'이라는 것이 상위지능에 속한지라 적절한-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어떤 친구는 발음에 문제가 있어 말 그대로 알아듣기가 힘들기도 하고 자폐의 경우는 사회성이 결여되어있기 때문에 지능이 높더라도 의미있는 관계를 맺는 것이 더더욱 어렵지요.

 

제가 주로 담당하는 남자아이가 있습니다. 자폐에 공격성향을 가진 친구인데 조울증을 가지고 있어서 아무 이유없이 큰 목소리로 웃다가도 기분이 나빠지면 자신의 얼굴을 때린다거나 물건들을 던지고 소리지르며 울곤합니다. 대체로 아이의 폭주를 막는 것에 집중하게 되지만 어느정도 잠잠해진 후에는 교사 스스로 아이의 행동의 이유를 찾게 되더라구요. 전날 잠을 잘 못잔걸까, 아침에 밥이 맛이 없거나 배가 고픈걸까, 날이 너무 덥거나 햇살이 강하게 비쳐서 그런가.. 정답을 알 수 없는 질문에 던져지는 것이죠.

 

저는 '일반적으로' 라는 말을 잘 사용합니다. STJ에게 보편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기준에 가까운 것이거든요. 하지만 일반의 틀로 해석할 수 없는 아이들을 보면서 이해하고자 하는 나의 노력이 때론 부질없게 느껴질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아이들을 사랑하는건 존재로 받아들이는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학생들을 교육하는데 유용하지 않더라도-행동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것을 다른 행동으로 대체하거나 없애는 것이 방법론적인 교육이지요- 특수교육에 있어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교제를 하면서 화성과 금성에서 왔다고 할 정도로 남자와 여자의 다른 존재에 당황하며 어려운 시기가 있었는데 그 때에도 나와 다름을 인정하면서 (제가 생각할 때;) 많은 도움을 받았던 것 같아요. 나의 기질과 경험에 비추어 상대를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있더라구요. 사랑이라는 것이 상대의 성숙과 안정을 소망하는 것이지만 그의 존재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더라구요. 오히려 나를 용납하는 상대의 사랑에 감사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동안 내가 훈계했던 수많은 후배들이 생각이 납니다. 딴에는 그들의 유익을 위한다고 했지만 짧은 내 소견으로 밀어붙였던 멤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한가득, 부끄럽기만 합니다.

 

마지막으로 요즘 읽고 있는 책 한구절로 마무리 할게요.

 

- 영적 우정이란 일차적으로 어떤 일들을 행하는 것들과 관련된 일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정확히 행함의 반대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하지 않는 것'을 선물로 주는 것이다. 즉 말을 가로막지 않는 것,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하지 않는 것, 이른 부적절한 충고를 하지 않는 것, 내게 맞았던 해결책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맞을 것이라고 속단하지 않는 것... 적극적 측면을 말하자면, 영적 우정이란 환대와 함께함(peace)과 대화를 선물로 주는 관계다. 이 세가지 속에도 행동의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삶으로 실천해야 하므로), 이들은 모두 존재 방식에 근거하고 있다.   

:: 거룩한 사귐에 눈뜨다, 5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