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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시간을 달리는 하루.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

노래 아이유 - 너와나


내가 좋아하는 영화와 노래이다. 이 둘 뿐만 아니라 시간이라는 소재가 쓰인다면 대체로 몰입하면서 감상하는 편이다. 시간의 특성 중 비가역성이라는 성질이 있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라고 한다. 그렇기때문에 지나가버린 시간이란건 언제나 아련하고 애틋한 마음이 드는가보다.


오늘은 참 특별한 날이었다. 지음이를 부모님댁에 맡긴지 나흘이 넘어가면서 마음이 쓰이고 보고싶은 것과는 별개로 아내와 둘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신혼때 생각이 조금 나더라. 암것도 모르지만 어떻게든 하면 될 거 같던 그 시절. 단둘이 손잡고 거리를 걷고 챙겨주지 않고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재우지 않고 잠이 드는 그런 평범함. 다만 빈자리는 적지 않아서 간간히 아내는 눈물을 흘리고 나도 허전함을 느끼고 있다만.


오늘 홈커밍데이가 있어 역곡으로 가는 길에 서태지의 음악을 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솔로앨범이 아닌 아이들 4집 앨범을 들었다. '필승, 컴백홈, 시대유감, 1996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프리스타일' 등 익숙한 노래들이 헤드폰을 타고 들려왔다. 몇년만일텐데 바로 가사가 흥얼거릴정도로 반가운 노래들이었다. 어제 유스케에서 멋졌던 그의 모습에 자극이 되었나보다. 역곡을 가는 전철 안이 90년대로 복귀하는 듯 했다. (아마 1호선이었다는게 한몫했을거다ㅋㅋ)


언제나 그대로인듯한 역곡역. 익숙한 그 거리들을 걸었다. 졸업하면 쭉 살고 싶었던 그 동네. 눈 감고도 걸을 수 있을 것 같던 익숙함이 어찌나 반갑던지. 전에는 바뀐 간판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이제는 그 자리를 지켜주고 있는 상가들이 눈에 띄더라. 생과일쥬스 가게가 생겼다고 신나서 리더들이랑 놀러갔던 기억들, 누가 볼까 신경쓰이면서도 꾸준히 들렸던 만화책방, 일이 있거나 없거나 잘 챙겨먹던 순대볶음. 20대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보냈던 그 곳. 좋았던 기억들이 가득하다. 좀 민망했지만 곳곳에 사진을 찍으며 길을 걸었다. 나 자신이 간직하고 싶기도 하고 아내와 공유하고 싶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일상을 살아가는 자리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나에겐 스무살의 대학생이 된 듯한 착각을 주었다.


익숙한 그 거리, 여전한 그 가게





여전히 푸르른 캠퍼스


미리 학교에 도착해 여유있게 학사 총회가 열릴 강의실에 들어갔다. 자연스레 가방을 놓고 잠시 숨을 고르고 총회 준비를 했다. 지난 3-4년의 학사회장 자리를 정리하는 시간이라기엔 너무 짧고 급작스럽지만 참석할 학사들에게 학사회 운영방안에 대해 설명하고 같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게 되어서 좋았다. 반가운 얼굴들을 보고 총회를 시작했다. 나름 형식을 갖추려 했지만 틈이 많았는데 참석한 학사들이 조심스레 의견을 제시하고 질문을 던질 때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거 같아 감사했다. 오늘 하루 수고했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쑥스러워서 잘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위로가 되고 고맙고 그랬다.


학생들이 홈커밍데이를 잘 준비해주어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데코한 것들을 보면서 하나하나 종이를 사고 그림을 그리고 자르고 붙이고 했을 것을 생각하게 되고 프로그램 하나하나 성의껏 준비한 것들이 티가 많이 나서 고마웠다. 우리가 이런 대접을 받을만큼 잘하고 수고했나, 를 생각하면 쑥스럽지만 우리 또한 선배들에게 그랬으니까 알듯도 싶고. 학생들이 캠퍼스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참 궁금했는데 전보다는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던 것 같았다. 아마 내후년정도가 되면 아는 학생들이 없을텐데 오히려 더 이야기할 여지가 많아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했는데 감사장을 받게 되었다. 학사회장으로는 물론이고 학사로서도 내가 잘했는지 스스로 반문하게 된다. 많은 학사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어떤 비전이나 구체적인 계획이 있어서 시작한게 아니었고 나에게 툭 주어졌을 때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했었을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고 자녀가 생기고 이사를 하고 직장생활을 했을뿐.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하고 싶었는데 생색은 다 내면서 자리를 지킨 것 같아 부끄럽다. 나의 후임 학사회장은 나보다 덜 일하면서도 더 묵묵하게 대표의 자리를 지켜주면 좋겠다. 사람들 앞에서 약속했듯이 나도 보통의 학사로서 내 자리를 지켜야지. 소나기는 못간지 한참되었다만 홈커밍데이만큼은 정말 5년 10년이 지나도 나가고 싶다. 후배학생들이 우리도 이렇게 자리를 지켜주는 학사가 있구나 하면서 도전을 받고 격려를 받음 좋겠다. 



함께한 사람들



오늘 일정의 마지막은 신혼집에 들렸다. 시간이 좀 늦었지만 마을버스를 타고 갔다. 건물 앞에 서자 수많은 감정들과 추억들이 떠올랐다. 졸업 후 캠퍼스와 가까이 지내고 싶어서 옆동내에 집을 구했었다. 언덕 초입에 있는 5층 빌라였는데 올라가려면 심호흡이 필요했었던 집이었다. 그래도 전망만큼은 너무 좋아서 저녁 노을이 비치던 햇살이 아직도 그립다. 그 곳에서 후배들을 초대해서 같이 음식을 나누고 캠퍼스 이야기를 듣고 이성교제 상담도 해주던 날들. 아내와 둘이서 함께 봤던 TV 프로그램들, 벽지에 페인트칠을 하고 침대와 책장을 옮기느라 낑낑데던 기억, 지음이가 태어나기 위해 진통을 시작했던 밤까지 잊고 있던 추억들이 정말 많더라.


밤 늦게 오해받을까봐 긴장함


조금은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영원이란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개념이 아니지만, 태초란 우리가 되짚어볼 수 없을 아득한 과거이다만 하나님 앞에서 모든 시간은 고정되어 있다는 옛 강의가 떠오른다. 캠퍼스에서 리더로, 멤버로 혹은 간사로 수고하는 이들은 5년전 10년전의 우리들도 같이 하나님 앞에 치열하게 살아갔다는걸 알고 있을까. 우리가 대단한 자질이 있거나 특출하니 때문이 아니라 그 시간들을 보내고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것일 뿐이라는걸 알까. 이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임을 알지만 잠깐이나마 그 시간들로 돌아가 그 때의 마음, 그 때의 나를 만날 수 있었던 소중한 하루를 보냈다.



오늘의 마지막은 항우울제가 공연했던 악동뮤지션의 시간과 낙엽으로. 참 적절한 선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