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긴 밤이었다. 아니 긴 하루라고 하는게 더 적절한 표현이 될까. 자지러지게 울던 아기는 언제 그랬냐는듯 엄마품에 안겨 잠이 들고 난 아직 여운이 남아있는지 늦은 새벽에 깨어 출근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40여일간의 육아기간을 거슬러볼 때 기쁘고 감사한 순간들보다 버겁고 힘들었던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지금 알게 된 지식을 그 때도 알았더라면, 당시엔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별것 아닌 선택이 '습관'이 되어 나비효과를 일으킬거라 알지 못했던 시간들. 퇴근이 출근과 다름없는 단어가 되고 칭얼대는 아이를 안고 얼마 남지않은 출근시간을 걱정하던 늦은 새벽들. 그중에서도 날 가장 힘들게 했던 건 어느 것 하나 나의 통제범위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한다는 불확실함들.
특수교육현장에서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장애유형은 정신지체와 자폐학생들이다. 난 유독 자폐학생들을 어렵게 느끼는데 의사소통의 어려움 때문이다. 지능의 정도와 상관없이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전달되는 것도, 그의 이야기에 반응하는 것도 너무나 어렵기만 하다. 자폐학생이 공격행동을 보이거나 정서적 불안과 함께 눈물을 보일 때 수많은 가능성들을 머리속에 떠올려보지만 그건 결국 나의 관점에서 학생의 마음을 유추해보는 것일뿐 그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기에 참으로 어렵다. (그러다보니 날씨가 더웠나, 아침에 밥을 적게 먹었나, 공부를 하기 싫은가…정도밖에 떠올리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데 아기를 양육하는게 비슷한 부분이 많지 않은가. 아기의 소통방법은 울음밖에 없는데 부모는 상황을 해석하거나 아이의 패턴을 보거나 그 마음을 느껴서 문제를 해결해주어야 한다. 기저귀가 지저분하거나 배가 고프진 않은지, 온도가 너무 더워서 그런건지 부모의 품에 안기고 싶어서 그런건지 수많은 선택지들을 놓고 결정해야하는 것이다.
하루종일 예민해져서 우는 지음이를 돌보느라 지친 아내는 힘없는 미소를 짓고 친절한 말을 건네지만 끊임없이 바둥거리며 우는 아기를 대할 때의 무기력한 절망.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많은만큼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더 크게 느껴진다.
아내가 장염에 걸려 급히 부모님댁에서 기약없이 머물러 있기로 하였다. 정신없는 와중에 뭇내 걸렸던 것은 옥상에 있는 상추를 비롯한 작물들이었다. 무더운 여름에 장마철도 아니고 버텨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떠나는 길에 물을 넉넉히 주었다. 그리고 일주일. 집으로 다시 돌아와 옥상에 올라갔을 때 요놈들이 죽기는 커녕 잘 자라 있는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꽃까지 핀 모습을 보면서 지음이를 떠올리게 되었다.
공중의 새와 길가의 들플들을 먹이지 않아도 돌보시는 하나님. 생명의 씨앗이 그대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자라게 하신 섭리에 대해 잠시나마 생각해보았다. 결코 지금의 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 말이다. 미숙한 부모의 손길에도 아이는 자라날 것이다. 나의 수고와 지혜로 아기가 걷고 밤에도 잘 자게 되는 것이 아니라 때에 맞춰서 그렇게 자라날 것이다. 씨를 뿌리고 물을 줄 순 있지만 생명을 품고 자라게 하는건 온전히 하나님의 몫인 것처럼 지음이도 언젠간 어린이가 되고 우리가 그랬듯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가는 날이 올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나와 아내가 조급해하거나 낙심하여 포기하지 않기를. 그러고보니 아이를 기르는 일도 믿음이 필요한 영역임을 새삼 알게 된다.
아마 2주만에 지음이가 새벽시간에 곤히 잠든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아빠의 바람은 이렇게 낮밤을 가리게 되는 것이지만 앞으로 더 지켜봐야 할 것같다. 이렇게 지음이는 하나하나 아기로서 발달과업을 성취해 가겠지. 그만큼 새로운 고민과 여려움들이 찾아오겠지만.
부모라는 역할은 진성 훈련의 자리인 것 같다. 자신의 한계와 밑바닥이 너무나 쉽게 드러나지만 도망칠 수는 없는 훈련말이다. 오늘도 아무렇지 않게 자기연민과 우울이 가득하다 분노에 가득하기도 하고 날카로운 말이나 거친 행동을 묻어나오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인생이란게 참 살아갈만 하구나 생각도 하고 소소한 행복에 감사한 마음이 일기고 한다. 졸업을 하고 취직도 하고 결혼까지 했지만 이제야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다. 더 깊이 더 넓게 자라나는 시간이 되기를. 더디더라도 옳은 방향을 잃지 않기를. 그런 하루가 되길 소망한다.
40여일간의 육아기간을 거슬러볼 때 기쁘고 감사한 순간들보다 버겁고 힘들었던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지금 알게 된 지식을 그 때도 알았더라면, 당시엔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별것 아닌 선택이 '습관'이 되어 나비효과를 일으킬거라 알지 못했던 시간들. 퇴근이 출근과 다름없는 단어가 되고 칭얼대는 아이를 안고 얼마 남지않은 출근시간을 걱정하던 늦은 새벽들. 그중에서도 날 가장 힘들게 했던 건 어느 것 하나 나의 통제범위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한다는 불확실함들.
특수교육현장에서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장애유형은 정신지체와 자폐학생들이다. 난 유독 자폐학생들을 어렵게 느끼는데 의사소통의 어려움 때문이다. 지능의 정도와 상관없이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전달되는 것도, 그의 이야기에 반응하는 것도 너무나 어렵기만 하다. 자폐학생이 공격행동을 보이거나 정서적 불안과 함께 눈물을 보일 때 수많은 가능성들을 머리속에 떠올려보지만 그건 결국 나의 관점에서 학생의 마음을 유추해보는 것일뿐 그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기에 참으로 어렵다. (그러다보니 날씨가 더웠나, 아침에 밥을 적게 먹었나, 공부를 하기 싫은가…정도밖에 떠올리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데 아기를 양육하는게 비슷한 부분이 많지 않은가. 아기의 소통방법은 울음밖에 없는데 부모는 상황을 해석하거나 아이의 패턴을 보거나 그 마음을 느껴서 문제를 해결해주어야 한다. 기저귀가 지저분하거나 배가 고프진 않은지, 온도가 너무 더워서 그런건지 부모의 품에 안기고 싶어서 그런건지 수많은 선택지들을 놓고 결정해야하는 것이다.
하루종일 예민해져서 우는 지음이를 돌보느라 지친 아내는 힘없는 미소를 짓고 친절한 말을 건네지만 끊임없이 바둥거리며 우는 아기를 대할 때의 무기력한 절망.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많은만큼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더 크게 느껴진다.
아내가 장염에 걸려 급히 부모님댁에서 기약없이 머물러 있기로 하였다. 정신없는 와중에 뭇내 걸렸던 것은 옥상에 있는 상추를 비롯한 작물들이었다. 무더운 여름에 장마철도 아니고 버텨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떠나는 길에 물을 넉넉히 주었다. 그리고 일주일. 집으로 다시 돌아와 옥상에 올라갔을 때 요놈들이 죽기는 커녕 잘 자라 있는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꽃까지 핀 모습을 보면서 지음이를 떠올리게 되었다.
공중의 새와 길가의 들플들을 먹이지 않아도 돌보시는 하나님. 생명의 씨앗이 그대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자라게 하신 섭리에 대해 잠시나마 생각해보았다. 결코 지금의 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 말이다. 미숙한 부모의 손길에도 아이는 자라날 것이다. 나의 수고와 지혜로 아기가 걷고 밤에도 잘 자게 되는 것이 아니라 때에 맞춰서 그렇게 자라날 것이다. 씨를 뿌리고 물을 줄 순 있지만 생명을 품고 자라게 하는건 온전히 하나님의 몫인 것처럼 지음이도 언젠간 어린이가 되고 우리가 그랬듯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가는 날이 올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나와 아내가 조급해하거나 낙심하여 포기하지 않기를. 그러고보니 아이를 기르는 일도 믿음이 필요한 영역임을 새삼 알게 된다.
아마 2주만에 지음이가 새벽시간에 곤히 잠든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아빠의 바람은 이렇게 낮밤을 가리게 되는 것이지만 앞으로 더 지켜봐야 할 것같다. 이렇게 지음이는 하나하나 아기로서 발달과업을 성취해 가겠지. 그만큼 새로운 고민과 여려움들이 찾아오겠지만.
부모라는 역할은 진성 훈련의 자리인 것 같다. 자신의 한계와 밑바닥이 너무나 쉽게 드러나지만 도망칠 수는 없는 훈련말이다. 오늘도 아무렇지 않게 자기연민과 우울이 가득하다 분노에 가득하기도 하고 날카로운 말이나 거친 행동을 묻어나오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인생이란게 참 살아갈만 하구나 생각도 하고 소소한 행복에 감사한 마음이 일기고 한다. 졸업을 하고 취직도 하고 결혼까지 했지만 이제야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다. 더 깊이 더 넓게 자라나는 시간이 되기를. 더디더라도 옳은 방향을 잃지 않기를. 그런 하루가 되길 소망한다.
[꽃이 핀 방울토마토와 나물]
[참 고생이 많소]
[지음이 사진은 보너스 ㅎㅎ]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