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떠남




#. 2년간 근무했던 학교를 떠났다. 계획에 없던 작별로 인해 주어진 하루동안 정신없이 교실에 있던 물건들을 버리고 챙겼다. 컴퓨터에 남아있는 흔적들을 하나하나 백업하고 지웠다. 정신없이 인수인계를 마치고 참여한 송별회에서는 기대와는 달리 많은 이야기들을 나눌수는 없었다. 환풍기로 인해 멀어진 테이블 때문인지, 눈앞에 갈비에 집중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처음으로 (어쩔 수 없이가 아닌) 스스로 떠나기로 한 미안함일지도.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을 또 보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아쉬워했던건 그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이라는 것을.

#. 뜻하지 않게 새로운 학교를 찾는 상황이 되었을 땐 불안속에 눈 앞의 상황에 집착하게 되었다. 당장의 경제적인 책임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초조해져서야 마음 한켠 간절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의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영역에 이르러서야 겸손해질 수 있었던 나는 아내의 안면마비증세와 더불어 핀치에 몰려있는 상황에서 기도를 할 수 있었다. 깊고 오랜 호흡으로 기도할 수는 없었지만 나에게 가장 익숙한 방법인 찬양을 통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고백하며 더불어 묵상하는 방식으로 기도했다. 그것이 당시 나의 신앙의 고백이었다. 내 삶에 당신의 신실하심을 묵상하면서 마음은 한결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 새 학교를 계약하러 가는 길에 '이제는 독립해야 할 때'라는 생각을 했다. 편안하고 익숙한 곳으로부터의 독립. 왜 그래야만 하냐고 마음 한켠 되묻는 질문들 앞에서는 성숙하기 위해서라는 지고의 답이 떠올랐다. 언제부터일까 성숙이 나의 삶의 모토가 된 것은. 더디더라도 사람이 자라길 멈추는 순간 그 사람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떠남은 언제나 나에게 성숙의 모토가 되었다. 자신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하란을 떠난 아브라함의 발자취는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주었다. 나에게도 인생의 변곡점마다 떠남을 통한 성숙은 익숙한 경험이었다. 나의 공동체는, 내가 기꺼이 사랑하고 받아들이던 그곳의 사람들과 나의 위상과 공동체의 문화는 나를 변화시킬 수 없게 되었다. 그럴때마다 그곳을 떠난 선택은 나를 성숙할 수 있게 도왔다. IVF를 떠나 군대가 그랬고, 결혼과 출산이 그랬고, 매번 새로운 학교로 떠날 때마다 그랬다.  

#. 지난 2년간의 근무를 떠올리며 참 은혜로웠다는 고백을 했다. 서로가 각자 자신의 짐을 지면서도 어려움 앞에서는 함께 고민하고, 친구들보다 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도 나누는 직장 공동체로 지낸다는게 흔히 있는 일은 아닐거다. 경력도 나이도 제일 많은 교사로서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했지만 나의 모자람도 넉넉히 이해해준 동료교사들에 대한 감사함이 차오르며 코끝이 찡해졌다. 새삼 다시 이 멤버로 함께할 수 없구나, 참 좋은 시절이었다는 지나감에 대한 아쉬움과 고마움들이었다. 더불어 떠남에 대한 깊은 확신도.
 

#. 다음주부터는 낯선곳에서 근무를 시작한다. 낯설다는 의미에는 적응하기까지의 고됨이 녹아나 있다. 안정을 추구하고 갈등을 회피하는 나의 기질으로는 피하고 싶기만 하다. 이미 스트레스로 한동안 잠잠하던 통풍이 거세게 올라와 고생도 했다. 다만 내 삶의 그분에 대한 신실함을 여전히 신뢰한다. 3월은 언제나 새로움의 달이다. 두 눈이 번쩍 뜨이고 주어진 과업들을 향해 성큼성큼 내딛는 진취적인 시기이기도 하다. 새로움의 깨어남이 교사로서, 인간으로 더 깊이 성숙으로 이어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