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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읽기

언터쳐블 : 1%의 우정



언터처블 : 1%의 우정 (2012)

Untouchable 
9.1
감독
올리비에르 나카체, 에릭 톨레다노
출연
프랑수아 클뤼제, 오마르 사이, 앤 르 니, 오드리 플뢰로, 클로틸드 몰레
정보
코미디, 드라마 | 프랑스 | 112 분 | 2012-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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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터쳐블이라는 제목은 옛날 갱 영화를 떠오르게 하지만 '1%의 우정'이라는 부제에서 볼 수 있듯 이 영화는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자칫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경찰과의 과속레이스를 장난으로 받아들일만큼 편하고 친한 사이. 영화는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설명해준다. 

여기, 사람이 있다. 영화는 곧 절친이 될 전혀 다른 두 사람을 설정하는데 그 대비의 정도가 명확할 뿐 아니라 캐릭터가 만들어지면서 영화를 이끌어갈 힘을 얻는다. 백인과 흑인, 부자와 빈자, 고용자와 피고용자와 같은 인종-계급적인 차이 뿐 아니라 클래식과 대중음악과 같은 문화적 취향의 차이도 있다. 관계의 우위를 가릴 수 있는 많은 요소들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맞춰주는 요소는 장애와 비장애의 유무이다. 이로써 도움을 주는 관계와 받는 관계가 역전이 되기도 하면서 어느정도 관계의 평형을 만들어준다. 우정에 관한 이야기는 사랑 못지않게 많은 영화의 소재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가 의미를 갖는건 우정의 본질을 꿰뚫어본 지혜와 이를 극대화하는 인물설정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와 다른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 나의 일상에 그를 초대하고 내 삶을 나눈다는 것은 관계의 첫걸음이자 전부나 마찬가지라고 할 정도로 우정에 있어 중요한 요소이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서로의 삶에 녹아드는 과정을 영화는 잘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의 다름에 대해 섣불리 침범하려 하지 않는다. 가난에 대해 비난하거나 장애를 조롱하지 않고 자신의 취향의 우위를 점하고자 신경전을 벌이지 않으면서 그들은 서로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나와 다른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인다는건 두려운 일이지만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가진건 많았기에 주위에 사람들은 많았지만 장애로 인해 갇혀있던 사람은 친구를 통해 '신선한 공기'로 표현되는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지 못하는 인상을 줄 정도로 자유롭고 재능이 많았지만 가난으로 인해 범죄자 및 실직자, 추방당한 삶을 살아야 했던 한 사람은 친구로 인해 화가로서의 재능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던 친구들은 상대의 본질적 필요를 채워주는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환경에 갇혀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한 친구에게 자립할 수 있도록 자신을 떠나가게 허락하는 친구와 자신에게 갇혀 관계의 벽을 넘지 못하는 친구에게 연모하지만 다가가지 못했던 여인을 만나게 해준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 큰 갈등없이 넘어가는 이야기를 보면서 훈훈하지만 좋은 영화라고 이야기는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눔의 포인트 잡기도 어려워서 준비하지 못한 채 두번째 영화를 보고 나서야 이 영화가 어떤 부분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알것 같았다. 영화에 대한 나눔을 깊게 가진 후 여운이 오래 남았었는데 우정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나는 내가 맡고 있는 학생들이 떠올랐었다. 사회적으로 일상생활을 수행하는데 도움이 필요할 정도의 장애가 있다고 판정이 된 아이들. 전문가가 된다는 것의 어두운 이면에는 객관적인 태도라는 핑계로 상대에 대해 무디어진 태도를 취하기가 쉬운 것이 있는 것 같다. 조금만 더 하면 잘할 것 같고, 괜히 게으름을 피우거나 말을 듣기 싫어서 그러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참 많기도 했다. 아이들이 잘되길 바란다는 목적을 핑계삼아 인격적인 관계 맺기를 포기했었다. 가장 즉각적이고 확실한 효과를 수반하는 체벌을 통해 학생들을 통제하고 나를 두렵게 여기게 만듦을 통해 더 빠르고 분명하게 아이들의 행동을 조정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영화를 곱씹으며 내가 관계의 첫 걸음을 잘못 맺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격적인 관계라는건 상대방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학생들이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 학습의 속도가 더딜 뿐 아니라 전혀 하지 못할수도 있다는걸 인정하지 않은채 나의 '올바른' 기준만 강요하고 있던 나의 모습이었다고 할까. 사실 그러한 실패감이 나의 교사로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이 직업에서 벗어나고 싶게 한건지도 모르겠다.

미안했다. 이미 돌이키기엔 늦어버린 것 같은 시기에 놓여있는 우리의 관계가 마음을 무겁게 했다. 비겁하지만 조금 덜 화를 내거나 혼을 내는 정도의 수준으로 내 나름대로의 마음을 위안삼고자 했던 것 같다. 이제 이 아이들과는 더 이상 함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바른 목적을 가지고 있더라도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면 그건 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교육의 영역에서 그건 합리화될 수 없는 영역인 것 같다. 상대방의 삶에 관여하고 영향을 미치는건 그 다음이다. 조급증을 버리고 학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것인지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