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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부활의 아침

지난주는 한계에 부딪힌듯 했다. 낮밤이 바뀌어버린 막내에 맞추다 몸살이 덜컥 나버린 것이다. 목이 붓고 두통이 지끈거리다가 오한이 돋고나서야 몸살인걸 알았는데 처음 든 생각은 '어떻하지' 였다.

때마침 그 날은 산후조리도우미 이모님의 마지막 근무일이었다. 25일이라는 기간동안 모든게 다 좋진 않았지만 이모님께서 해주신 밥이나 깔끔해진 집, 정돈된 세탁물들은 분명 산후조리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제 독립해도 되겠다 싶기도 해 감사한 마음으로 작별을 맞이하려 했으나 큰 부담을 안은채 보내드릴 수 밖에 없었다.

퇴근후 들린 병원마져도 5분 차이로 진료가 마감이 되어 약국에서 파는 약만 살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엔 어떻게든 빨리 나아야겠다는 집념만 가득했다. 그간 퇴근후에 같이 아이들을 돌보던건 오롯이 아내의 몫이 되었다.

따듯한 물을 마시고 틈나는대로 잠을 자고 회복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출근할 때도 몸에 물한방을 묻힐 생각을 못하고 땀에 절은 채로 옷만 갈아입고 나갔으니. 그랬는데도 다음날 퇴근 후 들린 병원에서 의사가 들여다보곤 깜짝 놀라더군. 편도가 너무 많이 부었다고, 온 몸이 두드려맞은 것 같이 힘들텐데 괜찮았냐고. 요즘 잘 쉬지 못했냐는 질문에 애 키우느라고 그랬다고 대답했다.

막내가 태어난지 40일, 산후조리 중인 아내가 조금씩 몸이 올라오고 있었지만 무리해야 하는 상황에 괜찮을지 걱정이 되었던게 사실이다. 한시라도 빨리 나아야 한다는 생각에 오롯이 부담을 넘겨준 채 안쓰러이 지켜볼 수 밖에 없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아픈 것이 아내의 복귀를 확인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 같다. 새벽 늦게 잠에 못이겨 젼이를 내가 보곤 했지만 앓아눕던 이틀간 세 아이를 기대 이상으로 잘 봤던 것. 이제는  정말 도우미 이모님이 계시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기더라.

병원에 다녀와서 하루동안 나의 상태도 꽤 괜찮아졌다. 두통이나 오한은 거의 가라앉았고 목도 무언가를 넘기는데 아프긴 했지만 한참때에 비하면 살만 해졌다. 덕분에 토요일 오전에는 이전에 신청했던 공동육아 성교육에 참여하고 오후에는 동생이 집으로 와서 늦게까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동생과의 만남은 예상치 못한 기쁨이었다. 가족이 그런거지만 별다른 에너지를 들이지 않아도 편하게 대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아내와 동생이 성격상 적당하게 잘 맞는 부분도 있었다. 별거없이 음식 시켜먹고 예능보면서 낄낄거리며 보낸 시간이었는데 우리 부부에게 의미있는 대화들이 듬뿍 담겨있었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시댁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생활인으로서 의식하지 않았던 가족의 문화나 구성원들의 특징들이 결혼 후에는 다름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문제가 켜켜히 쌓여가곤 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중간자의 입장으로 잘 해석하거나 전달했으면 별 것 아니었을 일들도 부부간에는 어려움이 되곤 했는데 동생의 입을 빌어 나오는 우리집에 대한 이야기들은 그간 나의 설명과 맥을 같이하면서도 더 이해하기 쉽게 전달이 되었다.

밤늦게 동생을 보내고 아내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참으로 은혜로운 시간이었다. 부모님이나 동생, 사촌들과 같은 가족들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나의 역사 속에서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들을 온전하게 해석하고 수용할 수 있었다.

아내에게 지난 1년이 당신을 알아왔던 14년의 시간보다 더 깊이 알게 되어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과정이 지리하고 고통스러웠기에 다시 선택하라면 주저하겠지만 이제는 아내의 역사-가족들, 가정사, 지내온 일들, 그 각각의 감정과 선택들-를 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부부간의 성관계보다 더 친밀한 앎이 사랑의 본질에 가까운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짧은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다, 오늘은 세월호가 가라앉았던 세번째 4월 16일이기도 하고 교회력상 무덤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한 부활절이기도 하다. 간밤에 젼이는 다시 아구창이 재발해 오전에 두 아이를 교회에 보내면 병원에 다녀와야 할 것 같다. 예배는 참여하지 못하겠지만 일상속에서 작은 부활을 경험한 자로서 기꺼이 어려움을 감당해내는 하루로 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