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왜 우리는 혼내지 않고 화를 내는가

[오늘은 밖으로 나가 다른 기관에서 바리스타 교육을 받는 날. 오랫만에 날씨도 화창하다. 기관에서 보내주는 차를 타고 편히 도착해 커피와 관련된 이론적 공부를 시작하였다.]

#. 상황 1
 -  수업 도중 조용히 앉아있던 박ㅇㅇ군이 느닷없이 자신의 뺨을 때리기 시작한다. 교사들의 제지가 있기 전에 옆자리에 앉아있던 신ㅇㅇ학생의 뺨을 때렸다. 안경을 쓰고 있던 신ㅇㅇ군은 다행히 큰 상처가 나진 않았지만 분에 못이겨 씩씩 거리고 있다. 자폐를 가지고 있는 박ㅇㅇ군은 조울증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감정을 잘 통제하지 못하고 왜 화가 났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아마도 새로운 환경에 대한 거부감이 크지 않았을까 짐작할 따름이다. 교사와의 몸싸움과 거친 고성이 오간 후에야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던 박ㅇㅇ군은 밖으로 나가 다른 친구들의 수업이 끝날때까지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었다.

#. 상황 2
 -  어느정도 사태는 수습이 되고 학교로 돌아가는 차안. 학교 인근 버스정류장에 학생들이 내리고 몇걸음을 떼었을 때.. 어제 내린 빗물이 고인 웅덩이를 보고 윤ㅇㅇ학생이 길가에 주저 앉았다. 편마비가 있어 걷는데 불편한 윤ㅇㅇ양이지만 자신이 집착하는 것들에 발동이 걸리면 온 몸을 던져 달려들곤 한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와는 달리 윤ㅇㅇ학생의 강박증은 그 종류도 많고(어머니에 따르면 150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한번 시작되면 멈출 수 없다는 점에서 참으로 어렵다. '히히힉' 귀신같은 웃음소리와 함께 올라간 눈꼬리. 그녀만의 증세(?)는 오늘도 어머니의 차가 도착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서울에 나가신 어머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한시간동안 스타킹이 찢어지고 교사의 손등에 멍이 들었지만 잘 방어했는데 잠시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결국은 물웅덩이에 온 몸을 굴린채로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교사에게는 맡겨진 학생들을 가르치는 책임이 주어진다. 우리의 교육의 근본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성인이 되어 사회의 구성원으로 지낼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개인의 성공 이전에 일차적인 목표일 것이다. 특수교육을 받는 친구들에게 '사회화'는 더욱 중요한 이슈가 된다. 사회가 장애인들을 받아줄 수 있는 인식과 제도가 갖춰지는 것만큼이나 그 친구들이 사회에 들어갈 수 있는 기본기는 너무나 중요하다. 화장실을 혼자 이용하는 신변처리와 같은 기초는 말할 것도 없고 대중교통 이용과 같은 지식적인 측면이 아니더라도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예의라는 것 또한 상위지능에 속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친구들이 어려워한다.

교육은 가르침과 훈육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학생들에게 교사란 부모 이후에 만나는 절대자와 같아서 우리들의 말한마디와 행동 하나에 깊은 상처를 받거나 많은 성장이 이루어져가곤 한다. 선교단체에 있을 때 한두살 차이의 경험으로 리더라는 자리에서 멤버들을 돌보며 내가 그들과 다를바없는 사람이라는걸 뼈져리게 느꼈는데 교사가 된 이후에도 내가 학생들을 가르칠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씁쓸해지곤 한다. 이런 고민은 학생들에게 엄히 가르칠 때 더해지곤 하는데 선생이라는 자리가 주는 권위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상대방의 유익을 위한다는 포장으로 폭력을 가할 수 있는지, 때때로 내가 학생들에게 목소리를 크게 내거나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는 것이 그들에게 교육이 필요하기 때문인건지, 내가 무시당하거나 인내에 한계가 왔기 때문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맥락을 더욱 복잡하게 하는건 '상황 1'에 나온 자폐를 가진 학생이나 '상황 2'의 정신질환을 가진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다. 다른 사람과 소통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자폐의 경우 혼내는 이유나 목적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무의미하고 정신질환의 경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문제행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초기 특수교육의 선배들이 그들을 가두어놓고 전기충격을 가하며 교육을 자행했던 것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학생의 인권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학생들의 유익을 위해 인간성을 희생한다는 자기연민의 늪속에서 말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화를 내는 것인가, 혼을 내는 것인가. 이 미묘한 차이를 극복해내는 것이 좋은 교사의 자질이라고 생각한다. 체벌에는 힘이 있어서 즉각적인 교육의 효과를 볼 수 있게 된다. 다만 그 기저에 두려움이나 혐오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말죽거리 잔혹사'에 잘 표현되었듯이 근현대를 지나는 한국의 교육은 훈육에 기초해 진행되었다. 마치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율법의 올무가 되었던 것처럼 학생들에게 엄한 교육을 제공한다는 뿌리가 도를 지나친 폭력, 머리길이를 비롯한 자기표현의 제약, 모범학생과 불량학생의 이원화와 같은 잘못된 가지들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어긋난 교육의 피해자인 어른들이 이제는 학생의 인권을 지켜야 한다며 체벌금지를 외치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소위 말하는  '인격적인' 접근만으로 바른 인성을 가질 수 있을까. 우리가 그 아이들의 자존감을 지켜주기 위해 치르는 대가는 정말 없는 것일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교육에는 가르침과 훈육이 공존하고 있다. 우리의 본성이 마냥 선하지 않다는 것은 어른들이 만들어낸 세상을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은가. 우리가 대화를 통해 서로의 이익을 지켜주고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이렇게 불공평하고 어둡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교육을 제공하라고 국가에서 교원을 양성하고 전문가의 자격을 주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하나님께서 자녀를 위해 엄한 사랑으로 대하신다고 한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12:7-8)

그렇다면 우리 가르치는 사람은 배우는 자들에게 맡겨진 책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 나는 어리석은 자라 학생의 유익을 위한 엄한 사랑과 나의 분에 못이겨 가하는 폭력과의 구분이 어렵기만 하다. 혼내야하는 순간에 나의 감정이 실린다면 학생들에게 배움을 선사한다는 나의 의도는 이미 끝나버리겠지. 나보다 약한자에게 나의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폭력일 수 있다는 김병년목사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여전히 하나를 가르쳐주면 반의 반도 이해하기 어려운 친구들을 대하는 것이 어렵지만 말이다.

좋은 교사가 되는 것이 좋은 아버지가 되는 토대가 될 수 있을까. 30명의 초등학생을 지도해야하는 은정이나 반도 안되는 12명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나나 자신이 없어지기는 매한가지인 것 같다. 아이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오늘을 교훈삼아 더 나은 내일의 교사가 되야지. 원래 1년차 리더의 멤버나 처음 나은 자식은 실험체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말이다. (아, 미안) 이 글을 쓰는 도중에 다시 한번 박ㅇㅇ학생에게 얼굴과 목을 할퀴고 부둥켜 한바퀴를 구르는 몸싸움을 벌였다. 그럼에도 내일 또 이짓을 하기위해 기쁜 발걸음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이 교사로의 부르심이라 감사히 여기겠다.